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돌프 히틀러 (문단 편집) === 성격 === > 히틀러를 매일 보았고 누구보다도 가까운 거리에서 자주 히틀러를 접했던 수행원과 비서 같은 보좌관 중에서도 지도자라는 껍질 안에 숨겨진 진솔한 히틀러를 엿보았을 만큼 히틀러를 잘 안다고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었다. 히틀러는 언제나 거리를 두려고 애썼다. "대중은 우상을 원한다."고 그는 훗날 말했다. 히틀러는 대중뿐만 아니라 자기를 바로 옆에서 보필하는 사람들에게도 우상처럼 굴었다. 군중 앞에서는 폭포수처럼 말을 쏟아냈고 측근들에게도 기나긴 독백을 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히틀러는 기질적으로 자기를 드러내기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불신과 냉소가 워낙 몸에 배어서 남들에게 고백을 한다거나 하는 일은 도통 없었다. 수백만 명 앞에 드러난 공인의 모습과는 달리 히틀러는 지극히 폐쇄적인 사람이었다. 제대로 사람을 사귀는 경우도 드물었다. 아무리 오래전부터 알고 지냈던 사람이더라도 히틀러는 일정한 거리를 두었다. 히틀러가 부담 없이 반말로 대하는 사람은 겨우 몇 손가락에 꼽을 정도였다. 오스트리아를 병합한 이듬해 어릴 때 가깝게 지냈던 아우구스트 쿠비체크와 상봉했을 때도 말을 꼬박꼬박 올렸다. 1933년 이후로 히틀러를 부르는 정식 호칭으로 자리 잡은 '지도자(Fuhrer)'라는 말은 이 딱딱한 사이를 잘 나타낸다. 히틀러가 권위를 누릴 수 있었던 것은 지도자에 따라붙는 후광을 잃지 않았기 때문이었고 자신도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히틀러는 아주 가까운 가신한테도 일정한 거리를 두려고 했다. 히틀러라는 인물이 '신비주의'를 불러일으킨 것은 히틀러의 성격 탓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그것은 권위를 살려주는 역할도 했다. 히틀러의 입장에서는 인간적 따뜻함보다는 자기의 권의를 사람들이 알아주는 것이 더 중요했다. >---- >이언 커쇼 히틀러 (p. 68~69) > 히틀러가 하는 행동의 대부분은 어떤 효과를 노리고 연출한 쇼였다. 불같이 화를 내고 폭발하는 것도 실제로는 의도적인 것이었다. 히틀러는 기회가 생기면 평당원과 만나서 굳게 악수를 나누고 '남자답게' 눈을 바라보았는데 초라한 평당원에게는 죽어도 잊지 못할 감격스러운 순간이었다. 그렇지만 그 행동은 개인 숭배 열풍을 강화해 운동의 기반을 다지고 지도자와 추종자 사이를 더욱 끈끈하게 만드는 데 필요한 연기일 뿐이었다. 실제로 히틀러는 추종자들에게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앞장서서 히틀러를 따르던 사람도 1928년 히틀러가 "인간을 경멸한다"고 비판했다. 히틀러의 성격에서 자기 중심주의는 실로 엄청난 비중을 차지했다. '자애로운 아버지'라는 선전의 이미지가 내면이 공허를 감추었다. 그는 쓸모있는 사람에게만 관심을 기울였다. >---- >이언 커쇼 히틀러 (p. 415) > 유대인 학살에는 분명히 히틀러의 책임이 있다. 그렇지만 유대인을 공개 연설에서 그렇게 비난하고, 갈수록 급진화되는 극단적 폭력을 그렇게 선동하고, 자기의 '예언'이 이루어진다면서 그렇게 겁을 주었지만, 히틀러는 유대인 살해에 자기가 관여한 흔적을 절대로 남기지 않으려고 노심초사했다. 어쩌면 최고의 권력을 누리는 동안에도 히틀러는 유대인의 권력을 두려워했는지도 모른다. 언젠가는 유대인이 '복수'를 할까 봐 두려웠는지 모른다. 히틀러 자신의 비밀주의도 한몫 거들었겠지만, 어쩌면 독일 국민이 무시무시한 비밀을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되어 있다고 생각한 나머지, 끔찍하긴 해도 두루뭉술한 표현으로만 그 문제를 언급했는지도 모른다. 측근들과 함께 있는 자리에서도 히틀러는 유대인 살해를 솔직하게 거론하지 않았다. 히틀러가 있는 자리에서는 아무리 그 범죄를 작당하는 장본인들이 동석했더라도 유대인 살해를 완전히 알고 있는 것처럼 거론해서는 안 된다는 불문율이 있었다. >---- >이언 커쇼 히틀러 (p. 598) 아돌프 히틀러와 사적으로 친분을 맺었던 사람들의 평가는 '''다정다감하며 친절했다고 한다.''' 물론 이는 절대다수가 그와 친분이 있었던 이들의 증언에 의존한 탓도 있지만, 최소한 그가 저지른 온갖 만행과 전쟁범죄와는 무관하게도 주변사람들에게는 되도록이면 다정하고 소탈하게 대했다는 것 자체는 사실인 듯 하다. 본래 아무리 악명을 떨친 독재자라도 의외로 주변 인물들에게는 예의바르고 친절하게 대한 경우가 많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딱히 이상한 것도 아니다. 무엇보다 히틀러는 비록 나중에는 독재자가 되었지만 맨 처음 정권 자체는 독일 국민들의 선택을 받아 적법적으로 지도자의 자리에 오른 사람이다. 주위 사람의 호감조차 사지 못하는 사람이 온국민의 지지를 받는 건 꽤나 어려운 일이다. 이런 면모는 아돌프 히틀러의 말년에 그의 비서로 근무했던 [[트라우들 융에]]의 증언을 통해서도 확인해볼 수 있다. 그녀는 노년의 인터뷰에서 비록 아돌프 히틀러가 개인적으로는 주변 사람들에게 친절한 사람이었으나, 동시에 거대한 이상과 충동에 사로잡혀 타인에 대한 동정심이나 공감능력을 잃어가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2013년 96세로 사망한 [[로후스 미슈]] 전 SS [[통신병|통신]]상급반지도자의 증언은 아돌프 히틀러의 사생활을 연구할 때 중요하게 다뤄진다. 그는 독일 슈피겔 신문사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아돌프 히틀러는 자신이 만나본 사람들 중 가장 친절하고 다정했으며 최고의 상사라고 평했다. 아돌프 히틀러는 일하는 사람들의 직책을 부르지 않고 일일이 이름을 불렀으며 절대로 까먹는 일이 없었다고 증언한다. 요리사 만치를르아니는 퓌러 전속 채식 요리사였다. 그는 영화 [[다운폴|몰락]]에서도 등장한다. 조상 중 유태인이 있던 사실이 밝혀져 해고됐지만, 그가 연금 수령 및 재취업에 불이익이 없도록 주민등록상 순수 게르만으로 등재토록 아돌프 히틀러 개인이 조치를 취해 줬고, 전쟁 말기에는 아예 다시 불러들였다고 한다. 히틀러의 비서였던 [[트라우들 융에]]는 하루는 그에게 왜 결혼을 하지 않았냐고 물었다고 한다. 그러나 히틀러는 '나는 결코 가정에 충실할 그런 가장이 못되오. 그런데 그걸 알면서도 결혼을 한다는 것은 매우 무책임한 일.'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한 측근이 총통 관저에서 자신을 위한 음악회를 열자고 제안했다고 한다. 그러자 아돌프 히틀러는 자기 하나 때문에 예술가들을 귀찮게 하고 싶지 않다며 거절했다고 한다. 전속 사진사 호프만의 증언에 의하면 1933년 총리가 되기 전에 아돌프 히틀러의 측근들 중에서 집회나 공식석상이 아닌 평소에 아돌프 히틀러에게 '퓌러 각하(Mein Führer)'나 '[[하일 히틀러]]!'라고 부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고 한다. 주로 '''아돌프 히틀러 씨'''라고 불렀으며 낯을 많이 가리고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만 주절주절 수다를 떨기 좋아했다고 한다. 영화 [[다운폴]] 초반에서 묘사했듯이 한 친위대 장교에 의하면 "퓌러 사령부에 새로 부임받은 장교들이나 병사들은 퓌러를 만날 때마다 깍듯이 열정에 차서 "하일 히틀러"라고 경례를 한다. 하지만 퓌러는 공적인 자리도 아닌 이런 곳에서 너무 그러지 말라며 그냥 인사만 하라고 맨날 달래신다. 실제로 퓌러 사령부에서 좀 오래 있던 사람들은 그냥 퓌러를 만날 때 "좋은 아침입니다. 퓌러 각하."라고만 인사한다."라고 한다. 동류집단이 아닌 사람들에게서는 어눌할 정도로 침묵을 지켰다고 한다. 또 인간적으로 몹시 소탈해서 선물을 받으면 상이군인 병원이나 양로원 등으로 보냈다고 한다. 친구처럼 지낸 [[알베르트 슈페어]]의 증언도 있다. 아돌프 히틀러는 아무 말도 없이 둘이 몇 시간씩 산책하기를 즐겼다고 한다. 식사도 친한 사람 몇 명과 하거나 혼자 했으며, 친분이 없는 다수의 사람들과 함께 하는 일은 드물었다고 한다. 영화를 너무 좋아해서 [[괴벨스]]가 검열로 자르거나 수입 금지된 할리우드 영화 작품까지 특별히 들여와 밤새도록 감상했다고 한다. [[찰리 채플린]]의 영화를 즐겨 보았으며 자신을 풍자한 [[위대한 독재자]]는 포르투갈을 통해 입수해 두 번이나 감상했다. 덧붙여서, [[미국]]의 유명한 애니메이션 감독 [[월트 디즈니]]의 만화의 광팬이었다고 한다. 히틀러의 기미 상궁이었던 마고트 우엘트에 따르면 나름대로 주변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온화한 성품이라고 한다. 나치 정부를 좋지 않게 여기는 독일인도 히틀러와 한번 얼굴을 맞대고 나면 좋은 느낌을 받았다. 히틀러는 상대방 수준에 맞추어서 대화를 이끌어가는 재주가 있어서 거부감을 주지 않았고 합리적이고 포용력이 있다는 느낌마저 주었다. 본심을 드러내지 않는데는 일가견이 있었다. 히틀러와 마주앉아서 한번 대화를 나누면 아무리 히틀러를 욕하던 사람이라도 눈에 콩깍지가 끼었다. 성격이 꼬장꼬장하고 나치의 가톨릭 교회 공격을 비판했던 파울하버 추기경은 1936년 11월 초 베르크호프에서 히틀러와 세 시간 동안 만난 다음 비밀보고서에 "총리는 틀림없이 하느님을 섬기며 살고 있다."라고 썼다. 히틀러는 집에서 일하는 사람한테도 딱딱하고 정중하고 깍듯하게 굴었다. 느지막히 일어나서 시중을 받으면 비서한테 한 두 마디 고맙다는 말을 하는 편이었고 오후와 밤에는 함께 차를 마시기도 했다. 운전 기사이자 집사 노릇을 했던 아르투어 카넨베르크의 익살과 아코디언 반주에 맞추어 부르는 노래도 좋아했다. 히틀러 보좌진에 합류하고 얼마 안 된 공군 부관 니콜라우스 폰 벨로프가 신혼여행 때문에 자리를 비워야겠다고 했을 때도 조금 놀라긴 했지만 마음 편히 다녀오라고 말하는 아량을 보였다. 크리스타 슈뢰더라는 비서가 몸이 아팠을 때는 선물도 보내고 병원으로 문병을 가기까지 했다. 측근의 생일과 크리스마스도 꼬박꼬박 챙겨서 선물을 보냈고 선물을 고를 때도 신경을 썼다. 하지만 거기서 푸근한 정을 느끼기는 어려웠다. 히틀러는 다른 사람에게도 그랬지만 수행원도 쓸모가 있는 동안에만 챙겨주었다. 아무리 오래 자기를 섬긴 사람도 쓸모가 없어지면 그냥 내쳤다. 아랫사람들도 히틀러를 어르신으로 부르면서 받들어 모셨다. 그들은 히틀러를 무서워하면서도 우러러보았다. 히틀러에 대한 그들의 충성심은 강했지만 인간적으로 좋아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히틀러가 자리에 끼면 분위기가 딱딱해졌고, 히틀러가 있으면 마음이 편치않았기 때문이다. 히틀러는 생활 습관이 별났기 때문에 거기에 맞추다 보면 근무 시간도 늘어나고 몸이 고달팠다. 비서들은 대게 아침에도 일을 했지만 어떨 때는 밤 늦게까지, 심지어 새벽까지 기다리면서 장문의 연설을 받아 적어야 했다. 히틀러의 실제 성격은 폐쇄적이였기 때문에 자신의 측근들에게도 일정한 거리를 두려 애썼고, 자신의 속내를 절대 털어놓지 않았다. 또한 다운폴에서 나온 대로 사석에서 자신이 마음에 드는 사람들만 모아놓고 자기 혼자 무수히 많은 독백을 하는 것이 히틀러의 습관 중 하나였다. 그래서 히틀러와 이야기를 하던 중 [[제1차 세계 대전]] 이야기나 [[바그너]]의 음악과 관련된 이야기는 절대로 나오지 말아야 했는데, 이 이야기가 나오는 순간 히틀러가 흥분하여 먼 동이 터올 때까지 끊임없이 이야기를 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히틀러가 자신만 관심있는 주제를 주변 사람들에게 얼마나 이야기했던지 히틀러가 어떤 이야기를 하려는 순간 다른 사람들이 히틀러가 말할 내용을 술술 이야기할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러한 성격 때문에 히틀러와 같이 있으면 한 마디도 못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히틀러의 관심을 끄는 이야기가 나오면 몇 시간이 되었든 간에 곁에서 참을성을 가지고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야 했기 때문에 히틀러의 곁에 있을 때 대단히 불편해했다고 한다. 히틀러는 어떨 때는 쑥쓰러울 만큼 늘어지는 칭찬을 했지만 어떤 때는 비서들이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무관심한 모습을 보였다, 자신의 심기만 건드리지 않으면 누가 함부로 굴어도 눈감아 주었지만[* 가장 적절한 예시로 괴링을 들 수 있는데 온갖 부패와 사치를 벌이고 회의를 할때 약에 취해 졸거나, 슈페어나 풍크 등 군수 관계자들이나 해군 수뇌부들과도 의견충돌로 내분을 저지르기도 하는 등 온갖 실책에도 근신같은 조치를 취하지않았다.] 자신에게 기어오르거나 깔아뭉갠다고 느낀 사람한테는 가혹하게 대했다. 1923년부터 궂은 일을 한 빌헬름 브뤼크너의 여자친구는 히틀러에게 잘못 보여서 냉대와 수모를 당했다. 이후 사소한 언쟁 끝에 브뤼크너를 해고했다. 또한 오랫동안 일 한 카를 크라우제를 사소한 문제로 해고했다. 히틀러는 자기를 챙겨주는 사람들의 얼굴이 바뀌는 것을 굉장히 싫어해서 늘 똑같은 얼굴을 봐야 마음이 놓였다. 방랑자처럼 여기저기 떠돌면서 살아왔으면서도 히틀러의 생활은 지극히 단조롭고 융통성이 없어서 직원이 바뀌는 것을 싫어했다. 우정에 가까울 만큼 가까웠던 사람은 괴벨스와 슈페어였다. 히틀러는 두 사람을 좋아해서 자주 불렀고 두 사람의 아내와 가족과 어울리는 것도 좋아했다. 베를린에 있는 괴벨스의 집에 히틀러는 자주 방문했고, 베를린 재건축 사업을 놓고 슈페어와 장시간 대화를 나누는 것은 히틀러의 취미였다. 그것은 삭막한 정치의 세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취미 같은 것이였다. 괴벨스와 히틀러 사이는 부자지간과 비슷했다. 1937년 9월 전당대회를 마치고 히틀러는 밤에 비행기를 타면 좋지 않으니 자고 가라고 말하는 인간미를 드러냈다. 히틀러가 이 두 명과 친했던 것은 괴벨스에게서는 탁월한 선동가라는 자신의 분신을 보고 슈페어에게는 뛰어난 건축가라는 자신의 분신을 보았기 때문에 두 사람을 아꼈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히틀러의 성격유형을 분석해 볼때 대중적인 성격유형검사인 MBTI의 [[INFJ]] 유형의 가장 어두운 대표적인 인물이라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